서른 즈음, 가족을 위해 큰맘 먹고 가입했던 종신보험이 있습니다. 매달 적지 않은 보험료를 이십 년 넘게 납입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늘 씁쓸함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 돈은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가족에게 전해질 돈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열심히 부어온 보험료인데, 정작 내 노후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조금은 허무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 오랜 상식이 뒤바뀌었습니다. 일정 조건을 갖춘 계약자라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받을 수 있었던 그 사망보험금의 상당 부분을 살아 있는 동안 연금처럼 미리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오늘은 노후 대비 상식 코너에서, 이 새로운 제도인 사망보험금 유동화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사후소득에서 생전소득으로, 제도가 바뀐 이유
사망보험금은 오랫동안 오직 하나의 역할만 해왔습니다. 계약자가 세상을 떠난 뒤, 남겨진 가족의 생활을 지켜주는 돈이라는 역할입니다. 그러나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은퇴 이후의 삶이 이삼십 년까지 길어지면서, 정작 보험료를 오랜 세월 성실히 납입해온 당사자 본인의 노후 생활비는 부족한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자산의 상당 부분이 부동산이나 보험처럼 당장 현금화하기 어려운 형태로 묶여 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2025년 하반기 5대 생명보험사를 시작으로 첫선을 보인 이 제도는, 2026년 1월부터는 국내 생명보험사 전반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사망 이후에나 의미를 갖던 보험금을, 살아 있는 동안의 생활비로도 쓸 수 있게 문을 열어준 셈입니다. 사후소득이었던 보험금이 생전소득으로 전환될 수 있게 된 것, 이것이 이 제도가 갖는 가장 큰 의미입니다.
누가,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요
이 제도를 이용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선 계약자의 나이가 만 55세 이상이어야 하며, 소득이나 재산 수준에 따른 별도 제한은 없습니다. 대상이 되는 상품은 보험금이 확정되어 있는 금리확정형 종신보험이며, 사망보험금이 9억 원 이하인 계약이어야 합니다. 반면 시장 운용 실적에 따라 보험금이 달라지는 변액보험이나 금리연동형 상품, 짧은 기간만 납입하는 단기납 종신보험 등은 아직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또한 계약과 납입 기간이 각각 10년을 넘어 보험료 납입을 이미 마쳤어야 하고, 신청 시점에 그 계약을 담보로 한 보험계약대출이 남아 있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계약자는 사망보험금의 최대 90%까지 원하는 비율만큼 골라 유동화를 신청할 수 있고, 현재는 일 년에 한 번씩 나누어 받는 연지급형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매달 나누어 받는 월지급형도 순차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단계입니다.
미리 받은 만큼, 남는 보장은 줄어든다는 사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없던 돈이 새로 생기는 제도가 아니라, 원래 가족에게 남겨질 예정이었던 돈을 앞당겨 나누어 쓰는 제도라는 점입니다. 유동화를 신청해 살아 있는 동안 일부를 미리 받으면, 그만큼 세상을 떠난 뒤 가족에게 남겨질 사망보험금은 줄어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망보험금의 90%를 유동화해 생활비로 사용했다면, 이후 남는 보장은 원래의 10% 수준에 그치게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이 제도는 당장의 노후 생활비와 가족에게 남길 보장 사이의 저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의 노후 준비가 충분한 편이라면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을 수도 있고, 반대로 당장의 생활비 마련이 더 절실하고 가족의 다른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다면 적극적으로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정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실행에 옮기기 전, 반드시 따져봐야 할 것들
제도가 새로 도입된 만큼, 실제로 신청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세부 사항도 적지 않습니다. 우선 신청 이후에는 해당 계약에 대한 추가 납입이나 중도 인출 같은 다른 조정이 제한된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다만 마음이 바뀌었을 때를 위한 안전장치도 마련되어 있어, 신청 후 30일 이내 또는 첫 유동화 대금을 받은 뒤 15일 이내에는 철회할 수 있습니다.
세금 부분도 꼼꼼히 짚어야 할 대목입니다.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안내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과세 기준과 예외 사항은 계약 내용과 개인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직 시행 초기 단계인 만큼 세부 규정이 계속 다듬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신청을 고려하고 있다면, 반드시 가입한 보험사의 상담 창구나 세무 전문가를 통해 자신의 계약에 적용되는 정확한 조건과 세금 처리 방식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오래된 종신보험을 다시 꺼내봐야 하는 이유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고 지내던 종신보험 증권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한 번 다시 꺼내보시길 권합니다. 몇십 년 전 가입할 당시에는 오직 사후를 위한 대비책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 성격이 조금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계약이 유동화 대상 조건에 해당하는지, 만약 해당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활용하는 것이 자신의 노후와 가족 모두에게 균형 잡힌 선택이 될지 찬찬히 따져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평생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보험이,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가장 든든한 노후 자금의 한 축이 되어줄 수도 있습니다. 죽어야만 받는 돈이라는 오래된 생각을 내려놓고, 내 노후를 위한 선택지 중 하나로 다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대비는 시작됩니다.
본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특정 상품 가입이나 유동화 신청을 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보험금 유동화 제도는 2026년 들어 확대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부 조건과 세금 처리 기준이 보험사별로,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계속 조정될 수 있으므로, 실제 신청 전에는 반드시 가입하신 보험사와 세무 전문가를 통해 최신 기준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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